창세기 25:1-25:18
아브라함이 할 일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어졌다.
사라, 하갈, 그두라를 통해.
아브라함은 장자권 이양과 재산분배도 하였다.
이삭과 이스마엘도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배다른 형제라 서로를 싫어했을까? 서로가 자신이 진정한 장자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실제로는 서로를 이해했을 지도.
설령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최소한 아버지의 장례식은 함께 치렀다.
아브라함은 또 어떠했을까? 이스마엘을 차별했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아랍의 조상인 이스마엘을 이삭보다 먼저 낳아 버린 것은,
인간적인 마음으로 볼 때, 안타깝기 그지 없다. 조금만 더 기다릴 것이지.
하지만 어쩌겠나.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아무리 인내심 많은 아브라함도 도저히 아기를 낳을 수 없을 것 같은 노령의 나이 앞에
불안하고 초조했고 더는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마엘을 허락하셨는지.
또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시고, 자손을 번성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이스마엘을 사랑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허락하신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의 후손이 서로 싸우기를 바라셨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인간적 실수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믿음 좋은 아브라함이라 할 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것이라는 것, 잘 알고 계신다.
그것은 아담도, 하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실수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실수를 통해 내가 깨닫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고 받고 싸우라고 이스마엘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백보 양보하여 코란에서 말하듯 이스마엘이 장자라고 가정하고,
겉으로나마 평화를 표방하는 이슬람이,
서자 이삭의 후손과 싸우고 그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용납할 수 없다.
이삭과 이스마엘, 인간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면 서로 남남이다.
연락 끊고 안 보고 살면 그만이다.
근데 그게 안 된다. 싫어도 어떻게든 얽히게 되어 있다.
이슬람, 유대교, 크리스천이 너는 너, 나는 나가 안 되듯.
누가 장자인가의 문제,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마엘이나 이삭을 허락하셨던 것은,
언제까지나 싸우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남보다도 못한 너의 그 배 다른 형제에 대해 곰곰히 잘 생각해 보라고,
미워 죽겠는 그 놈이 바로 너의 형제라고.
더 이상 미워하지 말라고. 그 마음 버리라고.
더 나아가서는 육체적 형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이 사실 모두 너의 형제라고.
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허락하셨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실수였을지언정
역설적이게도 필연적으로 태어나야만 했다.
이삭을 가르치기 위해, 온 인류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들의 아픔을 품고 받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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