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4일 일요일

형제의 나라 터키에서 1000km를 달려 [자전거 세계일주]





터키를 여행할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만나는 터키인들마다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며 상당히 반겨준다. 그런 터키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형제라 불러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터키인들이 한국인들을 형제라 부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6.25전쟁 때 남한을 위해서 터키는 터키군을 파병했고, 그 중 일부는 우리나라 땅에서 피 흘려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남한을 위해 싸운 연합군에는 터키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 영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그리스,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이디오피아 등 그 밖에도 여러 나라가 포함되어 있다. 규모로만 따진다면 90%이상이 미군(180만명)이고, 터키군은 약 15천명 정도 된다고 한다. 한국인이 터키의 6.25 파병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창피한 부분이 맞다. 요즘 어린 학생들은 6.25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6.25전쟁에 파병해준 나라는 어떻게 알까? 솔직히 말해서 나를 비롯해서 6.25전쟁을 아는 우리나라 국민 중, 미국 외의 파병국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그만큼 그것이 좋든 나쁘든 6.25는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터키의 입장은 좀 다르다. 한국인이 6.25를 잊었다 해도, 터키가 6.25때 터키군을 파병한 사실만큼은 터키 국민이라면 기억하고 있다. 터키가 역사상 다른 나라에 파병을 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이자 유일했고, 그 사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 터키 정부는 국민들에게 교육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터키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마다 매일같이 귀찮을 정도로 형제를 외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난 미국에 가보진 않았지만, 추측컨데 내가 만일 미국에 간다면, 만나는 미국인들이 왠지 터키인들처럼 나를 보자마자 형제라 부를 것 같지는 않다. 파병한 사실을 바탕으로 형제라 부른다면, 지구상에 미국의 형제의 나라가 아닌 곳이 과연 어디일까?

그런데 터키인이 한국인에게만 형제라고 부르면 모르겠는데, 일본인이든, 헝가리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이건 뭐 누가 되었든 굳이 파병 같은 것은 안 했어도 터키인에겐 죄다 형제다. 그런 면에서는 딱히 우리한테만 특별히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얄미운 마음도 들지만, 터키인이 말하는 형제란, 차라리 친구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해야지, 그것을 곧이곧대로 형제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 처음 만났는데 형제가 아닌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 여행 중에 상당시간을 보낸 곳이 터키이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형제소리를 하고, 6.25 파병 얘기를 했다. 그 얘기 어제 들었는데, 오늘 또 듣고, 오늘 들었는데, 내일 또 듣고 하려니, 솔직히 듣는 형제로서도 매일 듣는 건 좀 많이 버거웠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M이라는 한 대학생 친구를 알게 되었다. 나는 M이 이스탄불 근처에 사는 줄 알고, M에게 숙박을 부탁해도 될는지 물었다. 그러자 M은 이스탄불 근처에 예전에 살기는 했는데, 지금은 이스탄불에서도 100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근처 시골 마을에 산다고 하였다. M은 한국에서의 유학경험이 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지식이 다소 있었고, 나를 자신의 집으로 꼭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그를 만나고 싶기는 했지만, 이스탄불에서 1000km나 떨어진 그의 집은, 애당초 나의 계획에 없던 곳이고, 너무 멀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러자 그는 다른 터키인들과 마찬가지로 6.25의 예를 들며 나를 형제라 불렀고, 자신의 먼 친척 할아버지가 6.25에 직접 참전하시기도 하였단다. 사실 그 동안 다른 터키인들이 아무리 나에게 형제라고 불렀다고 해도, 그들이나 나나 6.25를 겪은 당사자들은 아니기 때문에, 형제라는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6.25를 실제로 겪으신 할아버지라는 말에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그 할아버지가 만약 살아계신다면, 그 분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가 아닌가? 그 분을 뵙고, 6.25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 사람들 모두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형제 운운하지만, 그 분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바쳐 싸워주신 분이시다. M에게 그 할아버지를 뵐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집으로 오면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단다. 사실 난 터키 이후 이스라엘로 갈 계획이었고, M이 사는 곳에는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항구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1000km나 떨어진 M이 사는 곳으로 갈 이유가 두 가지 생겼다. 하나는 6.25 참전용사 할아버지를 뵙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로 갈 배를 찾는 것.

하루가 지났고, M이 나보고 어디 있느냐고, M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래서 난, 하루만에 1000km는 당연히 무리고,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삼일 후에 M에게 다시 연락이 왔는데, 나보고 어디 있느냐고, M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황당해진 난, 너도 알다시피, 너의 집이 멀고,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니, 시간이 필요하다고 다시 대답했더니, M ,

그래, 나도 이해해. 그러니까 시간을 충분히 가져. 하지만, 서둘러.”
듣고 보니 이 무슨 기괴한 소린고.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면서, 서두르라니?

그 이후로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독촉한다고 내가 빨리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시간이 필요한데, M은 자꾸만 독촉을 해댔다. 그때마다 난 M에게, M이 항구 근처에 사니, 터키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배가 그 항구에 있는지 좀 알아봐 줄 수 있겠는지 여러 차례 물었다. 항구 근처에 사는 M에게 항구에 이스라엘로 가는 배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내가 인터넷으로 알아보기도 했지만, 계절에 따라 배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모양이었기 때문에.

아무튼 난 드디어 1000km 달려 M이 사는 곳에 도착했고, 나를 만난 M은 나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M을 인터넷에서 알게 되었다고 사실 그대로 말해선 안 된단다. 누가 물으면 M과 나는 한국에서부터 이미 알고 지내던 관계로 말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내키진 않았지만, 일단 알았다고 했다. 여러 차례 알아봐달라고 했던 배는 어떻게 되었는지 묻자, M은 지금부터 알아보면 된단다. 아니, 지금부터가 아니라, 내가 알아봐달라고 몇 번이나 그 동안 부탁했는데, 아직도 안 알아봐주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했지만, 안 알아본 것을 이제와 어쩔 수도 없고, 같이 항구에 가서 물어보니, 이스라엘로 가는 배는 없단다. 사실 이스라엘과 터키는 형제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고, 없는 배를 M이 새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렇다면 내가 1000km를 달려온 또 다른 이유, 6.25참전용사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자기는 먼 친척이라 그 동안 몰랐는데, 이미 예전에 돌아가셨단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난 할 말을 잊고야 말았다
찾던 배도 없고, 6.25 참전용사도 없고.
난 무엇 때문에 1000km를 고생하며 달려온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의 황당함도 잠시, M은 시간이 많지 않고, 서둘러 갈 곳이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내 자전거는 일단 M의 형수의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호텔 앞 정원 같은 곳에 두었는데, 말이 호텔이지 규모가 작아 시골 여관 앞 마당 같은 곳이었다. M이 어디를 가자길래, 난 습관적으로 자전거를 잠그려고 했다. 그러자 M은 나를 제지하며, 자전거를 잠그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내가 내 자전거를 잠그면, 그것은 곧 자신의 형수의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비추어지니, 그냥 두라는 것이다. 자전거를 둔 곳이 여관의 안쪽의 안쪽도 아니고, 누구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개방된 곳이어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훔쳐갈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라고 했던가? M M의 형수의 아버지, 그리고 터키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불안했지만, M의 말대로 잠그지 않았다.

그때부터 M은 이리저리 나를 데리고 다니며, M의 아버지, 어머니부터 시작해, M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 형수님의 아버지, 어머니그야 말로 이집저집 사돈의 팔촌까지 다(아니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소개시켜주었던 것이다. 하루 동안 한 오십 명쯤 만났을까? 난 결혼해본 적은 없지만, 꼭 결혼식 하객에게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심정이 그런 것 아닐까 짐작만 해본다. 하객들은 한 자리에나 있지. 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솔직히 중간에 끊고, 좀 쉬었다 하든지 하고 싶었는데, 혼자 신이 난 M은 이미 나는 안 중에도 없었다. 어서 다른 집도 가야 한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게 손짓만 할뿐. 이건 뭐 내가 무슨 동네 사람 모두 나와 봐야만 하는 대단히 신기한 동물도 아니고. 나중엔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들어서, 핑계랍시고 생각해낸 것이, 자전거 옆에 중요한 짐을 두고 와서 그러는데, 좀 가지러 가도 되겠느냐는 말을 하려고 했다. 생각만 하고 아직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침 M에게 그 말을 하려던 찰나에, M이 먼저 내게 선수를 쳤다. 그때 M이 내게 한 말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으니.
M의 단호하고 강력했던 한 마디,

참아!”

그 말을 듣고 나서, 난 너무 황당하다 못해 화까지 났다.
아니, 하루 종일 참았는데, 뭘 더 어떻게 참아?’

그 동안의 M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M은 나를 손님으로 존중해주는 법은 거의 없었다. 혹시라도 M 옆에 계시던 형수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시지는 않은가, 늘 형수 아버지 눈치를 지나치게 많이 보았다. 난 솔직히 M의 부모님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신경 쓰일 것 같았으면 M의 형수의 아버지까지 만나야 할 건 없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추측컨데 M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그의 친척을 내게 소개시켜주는 것이 예의이고 호의라고 생각했던 걸까? M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인과 터키인은 형제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한국인과 터키인은 유럽인들과는 다르다. 유럽인들은 차가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난 M의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내 생각엔 한국에도 차가운 사람은 차갑고, 터키에 오기 전, 난 이미 수 많은 따뜻한 유럽의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나로선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것이다. M은 시종일관 그 따뜻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M이 도덕적으로 큰 결함이 있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M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좀 버거웠다. 어쩌면 나의 잘못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중간에 적당한 선에서 끊었어야 했는데, 괜히 뭐 다른 문화를 존중한다 어쩐다 하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만 갔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는 내가 오기도 전부터 그의 친척들에게 내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공지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 그 한국인 친구 온다더니, 그거 사실이냐?,
그 한국인 친구 오면 우리집에도 꼭 데려와야 된다 너!”

혹시 친척들로부터 이런 말이라도 들었던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나 언제 오냐고 매일 같이 물어대고, 나 오고 나서 하루 안에 그렇게나 많은 친척들을 만나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M의 가족까지는 모르겠지만, M의 사돈의 팔촌까지는 솔직히 나도 무리다.

솔직히 내가 느낀 바로는, 터키에서는 개인의 영역이라는 것이 존중이 좀 잘 안 된다. 대신 사람들 사이에 살가움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있다. 쉽게 말해 정이 있다랄까? 하지만 그 정 때문에, 이처럼 귀찮은 일들도 좀 일어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럽과 터키는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다난 터키를 자전거로 두 번 횡단하였는데, 한 번은 유럽에서 터키로, 다른 한 번은 터키에서 유럽으로 했다. 유럽에 있을 때는, 터키에서의 정이라는 것이 그립고, 터키에 가면, 유럽에서처럼 내 개인 영역을 좀 지켜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다. 사실 터키는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지역마다 사람들이 다르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에게 해 쪽에 사는 터키인들은 유럽인들에 가까운 성향으로 개인을 중시하는 편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터키에 있을 때는, 다른 문화로 인하여 힘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로 인해, 터키는 내 마음속에서 더더욱 잊을 수 없는 형!!의나라가 된 것도 사실이다. 늦은 밤, 왠지 모르게 잠 못 드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문득 형제의 나라 터키가 그리워진다.








댓글 1개:

  1. 여유를 느끼로 여행을 했지만.. 여유를 빼껴버린 느낌을 들게 하였군요.. 잘보았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