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3일 화요일
2014년 5월 4일 일요일
형제의 나라 터키에서 1000km를 달려 [자전거 세계일주]
터키를 여행할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만나는 터키인들마다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며 상당히 반겨준다. 그런 터키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형제라 불러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터키인들이 한국인들을 형제라 부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6.25전쟁 때 남한을 위해서 터키는 터키군을 파병했고, 그 중
일부는 우리나라 땅에서 피 흘려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남한을 위해 싸운 연합군에는 터키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 영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그리스,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이디오피아 등 그 밖에도 여러 나라가 포함되어 있다. 규모로만 따진다면
90%이상이 미군(약 180만명)이고, 터키군은 약 1만
5천명 정도 된다고 한다. 한국인이 터키의 6.25 파병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창피한 부분이
맞다. 요즘 어린 학생들은 6.25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6.25전쟁에 파병해준 나라는 어떻게 알까? 솔직히 말해서 나를
비롯해서 6.25전쟁을 아는 우리나라 국민 중, 미국 외의
파병국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그만큼 그것이 좋든 나쁘든 6.25는 이미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터키의 입장은 좀 다르다.
한국인이 6.25를 잊었다 해도, 터키가 6.25때 터키군을 파병한 사실만큼은 터키 국민이라면 기억하고 있다. 터키가
역사상 다른 나라에 파병을 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이자 유일했고, 그 사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
터키 정부는 국민들에게 교육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터키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마다 매일같이 귀찮을
정도로 “형제”를 외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난 미국에 가보진 않았지만, 추측컨데 내가 만일 미국에 간다면, 만나는 미국인들이 왠지 터키인들처럼 나를 보자마자 형제라 부를 것 같지는 않다. 파병한 사실을 바탕으로 형제라 부른다면, 지구상에 미국의 형제의
나라가 아닌 곳이 과연 어디일까?
그런데 터키인이 한국인에게만 형제라고 부르면 모르겠는데, 일본인이든, 헝가리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이건 뭐 누가 되었든 굳이 파병 같은 것은 안 했어도 터키인에겐 죄다 형제다. 그런 면에서는 딱히 우리한테만
특별히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얄미운 마음도 들지만, 터키인이 말하는 형제란, 차라리 친구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해야지, 그것을 곧이곧대로 형제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 처음
만났는데 형제가 아닌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 여행 중에 상당시간을 보낸 곳이 터키이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형제”소리를 하고, 6.25 파병
얘기를 했다. 그 얘기 어제 들었는데, 오늘 또 듣고, 오늘 들었는데, 내일 또 듣고 하려니, 솔직히 듣는 “형제”로서도
매일 듣는 건 좀 많이 버거웠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M이라는
한 대학생 친구를 알게 되었다. 나는 M이 이스탄불 근처에
사는 줄 알고, M에게 숙박을 부탁해도 될는지 물었다. 그러자
M은 이스탄불 근처에 예전에 살기는 했는데, 지금은 이스탄불에서도 100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근처 시골 마을에 산다고 하였다. M은
한국에서의 유학경험이 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지식이 다소 있었고,
나를 자신의 집으로 꼭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그를 만나고 싶기는 했지만, 이스탄불에서 1000km나 떨어진 그의 집은, 애당초 나의 계획에 없던 곳이고, 너무 멀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러자 그는 다른 터키인들과 마찬가지로 6.25의 예를 들며 나를 형제라 불렀고, 자신의 먼 친척 할아버지가
6.25에 직접 참전하시기도 하였단다. 사실 그 동안 다른
터키인들이 아무리 나에게 형제라고 불렀다고 해도, 그들이나 나나
6.25를 겪은 당사자들은 아니기 때문에, 형제라는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6.25를 실제로 겪으신 할아버지라는 말에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그 할아버지가 만약 살아계신다면, 그
분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가 아닌가? 그 분을 뵙고, 6.25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 사람들 모두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형제 운운하지만, 그 분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바쳐 싸워주신 분이시다. M에게
그 할아버지를 뵐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집으로 오면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단다. 사실 난 터키 이후 이스라엘로 갈 계획이었고, M이 사는 곳에는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항구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1000km나 떨어진 M이
사는 곳으로 갈 이유가 두 가지 생겼다. 하나는 6.25 참전용사
할아버지를 뵙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로 갈 배를 찾는 것.
하루가 지났고, M이
나보고 어디 있느냐고, M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래서 난, 하루만에 1000km는 당연히 무리고,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삼일 후에 M에게 다시 연락이 왔는데, 나보고 어디 있느냐고, M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황당해진 난, 너도 알다시피, 너의 집이 멀고,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니, 시간이 필요하다고 다시 대답했더니, M 왈,
“그래, 나도 이해해. 그러니까 시간을 충분히 가져. 하지만, 서둘러.”
듣고 보니 이 무슨 기괴한 소린고.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면서, 서두르라니?
그 이후로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독촉한다고 내가 빨리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시간이 필요한데, M은 자꾸만 독촉을 해댔다. 그때마다 난 M에게, M이 항구 근처에 사니, 터키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배가 그 항구에 있는지 좀 알아봐 줄 수 있겠는지 여러 차례 물었다. 항구 근처에 사는 M에게 항구에 이스라엘로 가는 배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내가 인터넷으로 알아보기도 했지만, 계절에 따라 배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모양이었기 때문에.
아무튼 난 드디어 1000km 달려
M이 사는 곳에 도착했고, 나를 만난 M은 나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M을 인터넷에서 알게 되었다고 사실 그대로 말해선 안 된단다. 누가
물으면 M과 나는 한국에서부터 이미 알고 지내던 관계로 말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내키진 않았지만, 일단 알았다고 했다. 여러 차례 알아봐달라고 했던 배는 어떻게 되었는지 묻자, M은 지금부터
알아보면 된단다. 아니, 지금부터가 아니라, 내가 알아봐달라고 몇 번이나 그 동안 부탁했는데, 아직도 안 알아봐주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했지만, 안 알아본 것을 이제와 어쩔 수도 없고, 같이
항구에 가서 물어보니, 이스라엘로 가는 배는 없단다. 사실
이스라엘과 터키는 형제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고, 없는
배를 M이 새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렇다면 내가 1000km를 달려온 또 다른 이유, 6.25참전용사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자기는 먼 친척이라 그 동안 몰랐는데, 이미 예전에 돌아가셨단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난 할 말을 잊고야 말았다.
찾던 배도 없고, 6.25 참전용사도 없고.
난 무엇 때문에 1000km를 고생하며 달려온 것이란 말인가?
찾던 배도 없고, 6.25 참전용사도 없고.
난 무엇 때문에 1000km를 고생하며 달려온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의 황당함도 잠시, M은
시간이 많지 않고, 서둘러 갈 곳이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내
자전거는 일단 M의 형수의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호텔 앞 정원 같은 곳에 두었는데, 말이 호텔이지 규모가 작아 시골 여관 앞 마당 같은 곳이었다. M이
어디를 가자길래, 난 습관적으로 자전거를 잠그려고 했다. 그러자 M은 나를 제지하며, 자전거를 잠그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내가 내 자전거를 잠그면, 그것은 곧 자신의 형수의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비추어지니, 그냥
두라는 것이다. 자전거를 둔 곳이 여관의 안쪽의 안쪽도 아니고, 누구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개방된 곳이어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훔쳐갈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라고 했던가? M과 M의 형수의 아버지, 그리고 터키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불안했지만, M의 말대로 잠그지 않았다.
그때부터 M은 이리저리 나를 데리고 다니며, M의 아버지, 어머니부터 시작해, M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 형수님의 아버지, 어머니…그야 말로 이집저집 사돈의 팔촌까지 다(아니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소개시켜주었던 것이다. 하루 동안 한 오십 명쯤 만났을까? 난 결혼해본 적은 없지만, 꼭 결혼식 하객에게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심정이 그런 것 아닐까 짐작만 해본다. 하객들은 한 자리에나 있지. 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솔직히 중간에 끊고, 좀 쉬었다 하든지 하고 싶었는데, 혼자 신이 난 M은 이미 나는 안 중에도 없었다. 어서 다른 집도 가야 한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게 손짓만 할뿐. 이건 뭐 내가 무슨 동네 사람 모두 나와 봐야만 하는 대단히 신기한 동물도 아니고. 나중엔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들어서, 핑계랍시고 생각해낸 것이, 자전거 옆에 중요한 짐을 두고 와서 그러는데, 좀 가지러 가도 되겠느냐는 말을 하려고 했다. 생각만 하고 아직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침 M에게 그 말을 하려던 찰나에, M이 먼저 내게 선수를 쳤다. 그때 M이 내게 한 말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으니.
그때부터 M은 이리저리 나를 데리고 다니며, M의 아버지, 어머니부터 시작해, M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 형수님의 아버지, 어머니…그야 말로 이집저집 사돈의 팔촌까지 다(아니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소개시켜주었던 것이다. 하루 동안 한 오십 명쯤 만났을까? 난 결혼해본 적은 없지만, 꼭 결혼식 하객에게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심정이 그런 것 아닐까 짐작만 해본다. 하객들은 한 자리에나 있지. 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솔직히 중간에 끊고, 좀 쉬었다 하든지 하고 싶었는데, 혼자 신이 난 M은 이미 나는 안 중에도 없었다. 어서 다른 집도 가야 한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게 손짓만 할뿐. 이건 뭐 내가 무슨 동네 사람 모두 나와 봐야만 하는 대단히 신기한 동물도 아니고. 나중엔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들어서, 핑계랍시고 생각해낸 것이, 자전거 옆에 중요한 짐을 두고 와서 그러는데, 좀 가지러 가도 되겠느냐는 말을 하려고 했다. 생각만 하고 아직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침 M에게 그 말을 하려던 찰나에, M이 먼저 내게 선수를 쳤다. 그때 M이 내게 한 말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으니.
M의 단호하고 강력했던
한 마디,
“참아!”
그 말을 듣고 나서, 난 너무 황당하다 못해 화까지 났다.
‘아니, 하루 종일 참았는데, 뭘 더 어떻게 참아?’
그 동안의 M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M은 나를 손님으로 존중해주는 법은 거의 없었다. 혹시라도
M 옆에 계시던 형수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시지는 않은가, 늘
형수 아버지 눈치를 지나치게 많이 보았다. 난 솔직히 M의
부모님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신경 쓰일 것 같았으면 M의
형수의 아버지까지 만나야 할 건 없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추측컨데 M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그의 친척을 내게 소개시켜주는
것이 예의이고 호의라고 생각했던 걸까? M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인과 터키인은 형제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한국인과
터키인은 유럽인들과는 다르다. 유럽인들은 차가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난 M의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내 생각엔 한국에도 차가운 사람은 차갑고, 터키에 오기 전, 난 이미 수 많은 따뜻한 유럽의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나로선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것이다. M은 시종일관 그 따뜻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M이 도덕적으로 큰 결함이 있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M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좀 버거웠다. 어쩌면 나의 잘못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중간에 적당한 선에서 끊었어야 했는데, 괜히
뭐 다른 문화를 존중한다 어쩐다 하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만 갔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는 내가 오기도 전부터 그의 친척들에게 내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공지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야, 너, 그 한국인 친구 온다더니, 그거 사실이냐?,
그 한국인 친구 오면 우리집에도 꼭 데려와야 된다 너!”
혹시 친척들로부터 이런 말이라도 들었던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나 언제 오냐고 매일 같이 물어대고, 나 오고 나서 하루 안에 그렇게나 많은 친척들을 만나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M의 가족까지는 모르겠지만, M의 사돈의 팔촌까지는 솔직히 나도 무리다.
솔직히 내가 느낀 바로는, 터키에서는
개인의 영역이라는 것이 존중이 좀 잘 안 된다. 대신 사람들 사이에 살가움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있다. 쉽게 말해 정이 있다랄까? 하지만 그 정 때문에, 이처럼 귀찮은 일들도 좀 일어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럽과 터키는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난 터키를 자전거로 두 번 횡단하였는데, 한 번은 유럽에서 터키로, 다른 한 번은 터키에서 유럽으로 했다. 유럽에 있을 때는, 터키에서의 정이라는 것이 그립고, 터키에 가면, 유럽에서처럼 내 개인 영역을 좀 지켜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다. 사실 터키는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지역마다
사람들이 다르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에게 해 쪽에 사는 터키인들은 유럽인들에 가까운 성향으로 개인을
중시하는 편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터키에 있을 때는, 다른 문화로 인하여 힘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로 인해, 터키는 내 마음속에서 더더욱 잊을 수 없는 형!제!의나라가 된 것도 사실이다. 늦은
밤, 왠지 모르게 잠 못 드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문득
형제의 나라 터키가 그리워진다.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Q10. 자전거 여행 중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을 때는 어디서? [자전거 세계일주]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나 웜샤워(warmshowers)를 자주 이용하지만,
도시가 아닌 작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카우치서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카우치서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을 때는, 어디든 잘 찾아서 잘 잡니다.
1. 숲속
가끔은 안에서 자는 것보다 밖에서 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머물 곳이 없던 참에
브라뇨라는 슬로바키아인 좋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캠핑하기에 최적인 장소를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친구가 전에 TV를 보다가, 슬로바키아에 찾아온 외국인을
현지인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만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를 만났을 때,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고 하더군요.
나를 만났을 때,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고 하더군요.
지금이야 정말 눈 감고도 텐트 칠 수 있지만,
처음에는 텐트를 가지고만 있었지 어떻게 치는 줄도 몰랐습니다.
브라뇨의 친구들이 도와주겠다고 해서,
설명서 필요하냐고 물으니,
웃으면서 자기들은 그런 것 필요없다고 하더니,
익숙한 동작으로 금새 그냥 텐트 쳐버리더군요.
그 숲 옆에 호수가 있어서 더울 때면 수영하러도 자주 갔었지요.
저만 혼자서 캠핑한 게 아니라,
저 친구들은 집에서보다 숲속에서 자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좋았지요.
같이 밥도 자주 해먹었구요.
2. 현지인 집 마당이나 정원
노숙을 하더라도, 장소선정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지요.
아무데서나 자다가, 누가 와서 저를 해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보통은 현지 사람들 사는 집 마당이나 정원에
텐트를 좀 쳐도 되겠는지 양해를 구합니다.
텐트를 좀 쳐도 되겠는지 양해를 구합니다.
여기서 잘 때는 장마 기간이었는지
몇 날 며칠 비가 억수같이 내려서 텐트 안에서 옴짝달싹 못했네요.
덕분에 텐트 안에서 기도 많이 했습니다.
3. 들판
아무래도 지붕이 없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많이 덥습니다.
4. 사막
사막에서는 나무가 귀하지요.
나무 아래가 그늘이 있고 좋습니다.
나무 아래가 그늘이 있고 좋습니다.
사실 자고 있을 때 야생동물이 덮치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었지만, 다행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걱정을 했었지만, 다행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개미나 모기를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요.
그리고 사막에서는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물을 자주 마셔 주어야 하고, 마시고 씻을 물을 항상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물을 자주 마셔 주어야 하고, 마시고 씻을 물을 항상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이 사진은 사막은 아니었지만,
사막에서도 이런 천막 텐트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베드윈을 만나면 얘기를 해서,
일을 조금 거들어 주고 숙식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5. 공원
어둠 속에서는 만나면 제일 반가운 것도 사람이요,
만나면 가장 무서운 것도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귀중품은 텐트 안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네요.
6. 폐가(또는 무허가건물)
아침에 보면 이렇게나 평화로울 수가 없는데,
밤에는 심리적인 것 때문인지,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많이 무섭습니다.
여행하는 친구들끼리는 어디에 가면
무허가 건물이 있다는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전기도, 물도, 화장실도 없지만,
나중에 도서관 같은 곳에서 대충 해결하면 됩니다.
당연하겠지만, 혼자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더 좋겠지요.
7. 수도원
사실 수도원에서 잘 생각은 아니었는데,
친구가 수도원까지 얼마 안 걸린다고 해서 구경 갔는데,
시간 꽤 걸리더군요. 집에 가려는데 너무 밤이 깊어버려서,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둔 매트리스 위에서
신세를 좀 졌습니다. 다른 신자 분들도 많이들 주무시더군요.
여행 중에 교회나 모스크에서 잘 수 있겠지만,
일부러 찾아간 적은 별로 없습니다.
가능한 한 누구에게도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8. 주차장 또는 창고
기름 냄새가 많이 나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환기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지만,
집 안으로까지 들이기에는 부담스러워 하실 수 있습니다.
전 당연히 그 분들의 심정 이해하고요.
전 호화로운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안전한 공간이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습니다.
9. 의자 위
당연히 많이 불편합니다.
몸을 많이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피곤에 장사 없습니다.
피곤하면 어디서든 쓰러져서 잘 잡니다.
10. 옥상 위
여름에는 많이 덥기 때문에,
옥상 위에서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하늘에 뜬 아름다운 별을 보며 잠드는 것도 좋습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는 것도 볼 수 있고요.
물론 모기는 조심하셔야겠죠.
옥상이 아니면 지붕도 좋고요.
11. 캐러밴
사용하지 않는 캐러밴이 제 친구 아지트 같은 곳인데,
하루 저녁 자게 해주었습니다. 여름에는 많이 덥더군요.
하루 저녁 자게 해주었습니다. 여름에는 많이 덥더군요.
12. 해변
사람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겠지요.
이곳 주위에 무슨 유원지가 있었던 것인지,
밤새 노래 소리와 자꾸 사람들이 텐트 주위로 걸어들 다녀서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장소선정이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밤이 너무 늦어 더 나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어느 해변에서 텐트 치고 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동네 청소년들인지, 제 텐트에 누가 뭘 강하게 던졌더라구요.
나가 보니 아무도 없었고, 던진 것은 진흙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저랑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 그냥 무시하고 다시 텐트 들어가서 자려는데,
또 진흙을 던지고 어디론가 숨더군요.
밤새 그럴 것 같길래, 세 번째 이후로는 그냥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혼내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려들 필요는 없었지요.
여행하다 보면, 어디를 가든 매번 만나는 친구들도 있기 마련인데요.
크로아티아를 여행할 때, 우크라이나에서 온 이 친구들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머물 곳이 없었고,
그 친구들이 여자이기도 해서, 하룻 저녁 제가 보디가드가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들이 저의 보디가드였을 수도 있고요. -,.-
13. 포도밭
자고나서 아침이나 여행길을 위해 포도 몇 송이를 서리할 수 있습니다.
농부님들께는 죄송하네요.
14. 경찰서 옆
15. 주유소
주유소 옆에서 특히 많이 잤는데요.
일단 안전하고, 물을 얻을 수도 있어 좋습니다.
일하는 친구들도 친절한 경우가 많고요.
머물 곳이 없을 땐, 개인적으로 주유소를 강추합니다.
16. 공사장
별로 추천하지는 않지만,
정 공사장밖에 잘 곳이 없다면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17. 국경 근처 구멍가게 옆
발칸반도를 지날 때 우기였는데,
국경을 넘을 때마다 궂은 날씨 때문에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산에서 비가 오면, 평지보다 더 힘들거든요.
산에 고립되어 있었고, 비 때문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라이딩하기도 힘들어서, 국경 근처의 구멍가게 앞에서 하룻밤을 지샜습니다.
더 이상 라이딩하기도 힘들어서, 국경 근처의 구멍가게 앞에서 하룻밤을 지샜습니다.
일하던 사람들은 다들 집에 가버렸고,
너무 춥고 분위기도 좀 무서워서 잠을 설쳤습니다.
불가리아에서 터키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또 눈이 너무 많이 왔네요.
자전거를 탈 생각은 꿈도 못 꾸었고,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 끌고 가는 것조차도 버겁더군요.
날은 이미 저물었고, 눈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버스 정류장을 찾아 그곳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러다 죽는 것 아닐까? 싶어서 불을 좀 피워 볼까 했지만,
나무들이 젖어 있어서, 그마저도 불이 잘 붙지 않더군요.
추웠다는 것도 어쩌면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듣자 하니, 눈이 내리고 있는 동안에는
온도가 그렇게 많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아무튼 지나다니는 차도 없고, 인적도 없고, 마을도 없어서 조금 힘들었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가뭄에 콩 나듯 지나가는 차를 한 대 겨우 잡아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좀 도와줄 수 있겠는지 부탁해 보았습니다.
제 자전거와 모든 짐을 실고도 남을 정도로 큰 차였음에도, 거절하더군요.
덕분에 눈보라 속에서 산속에 고립된 상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 아침을 맞았습니다.
자전거랑 제 모습의 사진을 좀 찍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가끔 극한의 상황에서 사진을 찍으신 분들을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의문인 것은, 정말 일분일초를 다투는 극한의 상황이었다면
과연 사진 찍을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겠지만,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래도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있었겠구나 싶습니다.
정말 극한의 상황에서는 사진 찍을 엄두는 커녕 오직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뿐일 테니까요.
앞서 소개한 장소들 이외에도, 버스 정류장이나, 소방서,
학교와 같은 곳에서 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자게 되든, 저나 여러분 모두 부디 잘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결론은,
우리집이 최고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보트 히치하이킹, 이스라엘에서 터키까지의 항해일지 [자전거 세계일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그리고 요르단 여행 후,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시리아 VS 이집트
문제는 두 나라 모두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
TV에서는 연일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뉴스가 나왔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두 나라 모두 자전거로 여행하기에는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시리아로 가. 내 말 믿어! 시리아 괜찮아.
TV에서만 시끄러울뿐이야. TV가 하는 말 다 믿을 것 없어."
또 다른 사람들은
"죽고 싶어 환장했어? 차라리 이집트로 가.
이집트 상황이 시리아보다는 나아."
지리적으로는 시리아에서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시리아가 여행하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정부는
시리아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고,
시리아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고,
여행금지국가를 무시하고 여행한 사실이,
귀국 후에 밝혀지면, 감옥에 가거나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단다.
그 당시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서 성지순례를 갔던 한국인들이
납치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시리아도 안 되고, 이집트도 안 되면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지중해 연안국가 어디로든 가는 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가장 좋았지만,
터키도 나쁘지는 않았다. 리비아는 안 되었고.
배를 얻어탄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일단 자동차처럼 많이 지나다니지도 않고, 규정도 까다롭기 때문이다.
절대 여자들을 무시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나,
이런 경우에는 같은 상황이라도 여자가 훨씬 유리한 측면이 있다.
유리하다고 하더라도,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더 위험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내 편견이겠지만,
여자도 아닌 나를 태워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항해에 대한 지식이 있다거나, 배를 고칠 줄 안다거나,
그도 아니면, 요리를 잘 하면 배를 얻어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냥 보통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어떻게 선박 수리를 알고 항해를 알겠는가?
그렇다면 요리라도 잘 할 수 있었어야 됐는데,
요리마저도 잘 못했고,
유일하게 잘 한다는 게,
먹기는 잘 먹는다는 거 하나?
일반적으로 배를 얻어타는 경우에는,
적어도 자신의 밥값 정도는 낼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거지잖아.
그 돈 있으면 날아갔겠지.
난 뭐 어여쁜 여자도 아니었고,
항해의 항자도 몰랐으며,
밥값마저도 낼 수 없었던,
한 마디로 냉정히 말해서, 그냥 쓸모 없는 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겐 50kg도 넘는 짐이 실린 자전거까지 있었다는 슬픈 전설이.
태워갈 사람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랄까?
내가 선장이라도 안 태워가겠는걸?
도대체가 말이 안 되니 원.
스스로도 스스로가 참 한심하게 느껴지더라는.
그래도 실제로 물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법!
가능성을 미리 점쳐 시도조차 안 해볼 수는 없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기에, 사람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빈틈이 있을 수 있는 거다.
한국에서 요르단까지 돈 없이 자전거 타고도 왔는데 뭔 일인들 못하겠냐는 말이다.
도와줄 사람을 결국 아무도 찾지 못한다면,
까짓것 시리아 가는 거지 뭐.
가기는 싫지만.
findacrew.net이라는 웹사이트에서,
이스라엘에 계시는 한 선장님을 발견.
그 분이 터키로 가신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메일을 드렸다.
답장에 대한 기대는 별로 많이 안 했다.
메일을 한 1000통 보냈으면 모르겠는데,
한 통 보내서 뭘 어쩌겠는가.
답장 안 주셔도 어쩔 수 없고.
끝내 답장 안 주시면, 그냥 다음 날 시리아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답장이 온 거라!
답장을 읽는데 숨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성함은 데이빗이라는 분이셨고,
77세의 미국인 선장님이셨다.
77세의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건강하시지만.
메일은 보내주셨지만, 아직 나를 데려갈지
확실히 결정하지 않았다는 애매한 대답을 하셨다.
사실 데이빗 선장님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데려가기를 원하셨다.
나는 선장님께 우선순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항해 경험이 풍부하고, 비용도 지불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하셨다.
듣자 하니, 처음에는 유능한 사람들이 다수 지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일이 생겼다며 지원했던 것을 결국에는 다들 취소했다고.
할렐루야!
선장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제 오직 나 하나.
선장님으로서도 항해를 혼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데이빗 선장님은 나를 터키까지 무료로 데려가시로 결정을 내리셨다.
살았다!
데이빗 선장님이 나중에 말씀하시기로,
내가 보낸 메일을 되게 좋게 보셨다고 하셨다.
내가 메일에다 "저는 솔직히 항해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라고 썼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안다고 말들은 많이 늘어놓지만,
정작 만나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그런 사람들은 실전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단다.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는,
나처럼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가 더 낫다고 하시더라는.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자, 이제 저와 함께 항해하실 준비 되셨나요?
요리를 하는 주방
주방은 영어로 키친(kitchen)이지만,
항해 영어로는 조금 다른 게 많단다.
항해 영어로는 갤리(Galley)라고 부른다고.
그 외에도 기본적인 항해 영어에 대해 데이빗 선장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제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일본이라는 글자 때문에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해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저는 크리스천이고, 티셔츠에 쓰여진 イエス♡日本은,
예수님께서 일본을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저 친일파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전, 일본이든, 중국이든 모든 나라가 증오의 고리를 끊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라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내가 탈 배의 이름은 시 심포니(Sea Symphony)
배의 왼쪽은 영어로 포트(PORT)라 부르고,
오른쪽은 스타보드(STARBOARD)라고 부르는데,
잊어버리지 말라시며 내 왼 손가락에 PORT라고 써 주셨다.
매듭 짓는 법도 배웠다.
매듭 잘 짓는다고 칭찬도 받았다는.
지금은 다시 까먹었다. -,.-
일정표
아침 일찍 일어나 항해 준비하기!
물과 기름은 항해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 아니 둘
항해할 때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냈다.
딩이(Dinghy)
구명보트. 딩이라는 발음이 왠지 정겹게 느껴지더라는.
윈치(Winch)라고 부르는데,
이 녀석이 나를 바쁘게 만들곤 했다는.
이 녀석이 나를 바쁘게 만들곤 했다는.
내가 요리를 잘 못한다.
그래도 우리 데이빗 선장님을 위해 한 번 노력해보았다.
한국의 대표적 음식, 비빔밥.
데이빗 선장님은 매운 음식을 잘 드신다고 하셨다.
내가 만든 비빔밥 좋아하시는 건지?
다 드시긴 했는데, 식사 후에 바로 물 마시러 가시더라는.
아니, 매운 거 잘 드신다더니. -,.-
내 방 창문으로 보이던 불빛
항해하는 동안 자전거는 내 방 옆 발전기 근처에 두었다.
항해시에는 무엇을 먹든 꿀맛이었다.
데이빗 선장님 말씀으로는, 배 안에서 아무 일도 안 하더라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근육이 늘 움직이기 때문에,
그 운동량으로 인해 음식이 맛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터키로 가는 길에 사이프러스에 들러 물과 기름을 충전했다.
그 날의 항해가 끝날 때면, 와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데이빗 선장님
어떨 때는 밤새워 항해하기도 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긴 했지만,
밤에 하는 항해는 정말 황홀했다.
잔잔한 바다와
달
차분한
하늘에서 반짝이는 수 많은 별들
아무 걱정이랄 게 없는
지극히 평온한 시간
무아지경
시간이 마치 멈추어 버린 듯한
배도 움직이고 카메라를 쥔 내 손도 움직여서
재미있게 일그러진 달 사진을 많이 얻었다.
몇 시간마다 교대로 키를 잡았다.
밤에는 나침반보다 별을 보고 항해하는 클래식한 방법이 더 정확했다.
가끔 되게 추웠지만, 밤바다를 뚫고 빠른 속도로 항해할 때면,
다분히 흥미진진하기도 했다는.
사실 항해 첫날, 뱃멀미로 고생을 많이 했다.
안에 것 다 토해내고, 아무 일도 못 하고 갑판 위에서 시체처럼 거의 죽어 있다시피 했다.
내 방이나 주방이라도 한 번 갔다 오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멀미약을 먹고나서부터는 그래도 많이 괜찮아졌지만.
선장님은 갑판 아래로 절대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다.
음식도 매번 선장님께서 손수 해서 내게 가져다 주시곤 했다.
한국식 사고방식으로는 77세의 할아버지가
매번 식사를 차려서 손자뻘인 내게 배달해주시는 게 마음이 썩 편치가 않았다.
배도 공짜로 타는데, 나는 밥값도 못 하고.
물론 차려주시는 밥이 맛있기는 했지만.
원래 누가 차려주는 밥은 언제나 맛있는 법이다. -,.-
거북이처럼 보이던 섬
항해하다가 장난기 발동
배 안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데이빗 선장님이 내 구린 영어도 많이 교정해주셨다.
내 영어 생각보다 그렇게 구리지는 않다고.
단어 선택과 특히 회화보다는 작문 쪽이 더 나은 것 같다고 격려를 해 주셨지만,
난 여전히 내 영어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데이빗 선장님은 무료로 터키까지 데려다 주시기로 하셨고,
항해도 가르쳐 주셨고,
영어도 교정해 주셨고,
매번 맛있는 음식도 차려 주셨고,
퇴직하시기 전에 변호사로 일하실 적,
흥미로운 인생 이야기도 많이 들려 주셨다.
세상에 이런 은인이 또 계실까?
그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런지.
선장님께 감사드리는 마음과 데이빗 선장님과 함께 항해하면서도,
왠지 모를 선장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함께 들었다.
터키가 가까워질 수록, 선장님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을 출발한지 일주일이 지나,
마침내 우리는 터키의 마마리스에 도착했다.
선장님은 터키가 마치 고향처럼 느껴지신다고 하셨다.
마마리스에 친구 분들도 많이 계셔서,
친구들 만나러 가신다고 딩이를 내리셨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많아서, 우리는 항구 근처 바다 위에 닻을 내렸기 때문에.
무사히 첫 항해에 성공한 기념으로
와인이랑 발사미 소스랑 이것저것 차려서 혼자서 자축 파티를 열었다.
터키까지의 항해는 끝났고 나는 다시 나의 자전거 여행을 계속해야 했지만,
데이빗 선장님의 다음 항해 준비를 조금 도와드리고 떠나기로 했다.
데이빗 선장님과 함께했던 꿈만 같던 항해.
이번 자전거 세계일주에서 최고의 추억 중 하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선장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내겐 과분한 행운이었고,
선장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나를 shipmate라 불러주셨던 데이빗 선장님,
너무 그립습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
스페인 알헤시라스에서 한 달 동안 남미로 가는 배를 찾았었다.
안타깝게도 눈에 보이는 소득은 얻질 못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배를 못 찾았다는 것 또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만약 그 때 내가 배를 찾았다면, 내가 얼마나 교만해졌을까?
아, 하는 일마다 다 되는구나!하면서.
우리의 현실은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케 해주셨음에 감사드리고 싶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적어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이 감사하다.
다시 세네갈 다카르로 왔다.
여전히 배를 찾고 있다.
늘 그렇듯 부정적인 대답만 많이 들었다.
그로 인해 조금 지쳤다 사실.
그렇다고 많이 걱정하고 싶지는 않다.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씩 마음이 요동을 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
집에 가야 되나?
여기가 끝인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나를 응원해주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길었던 터널 끝에서 희미한 빛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요르단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또 다시 그렇게 운이 좋을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케도 불안하게도 만든다.
지켜봐야겠지.
내일도 내일의 해는 뜰 테니까!
이런 게 모험인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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