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0일 토요일

내 눈에 비친 지브랄타




돌산에 원숭이 빼고는 볼 것도 없고, 참 실망스러운 곳이다.
유럽을 떠나기 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한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국경 너머로 스페인에는 라리냐(La Linea)라는 도시와,
그곳에서 20km 정도 서쪽으로 알헤시라스(Algeciras)라는 도시가 있다.
지브랄타는 영국령이기 때문에, 국경 통과시 여권을 보여주어야 하나,
형식적인 절차일뿐, 여권을 제대로 확인하지는 않는다.
지브랄타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페인에 비해 물가도 비싸고,
모든 것이 다 돈인, 돈 없이는 지내기 힘든 곳이다.

라리냐와 알헤스라스에 친구들이 몇명 되는데,
예외없이 그 친구들 모두가 지브랄타의 도박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브랄타에 살기에는 물가가 비싸기 때문에, 스페인에 살며 통근을 한다.
지브랄타에는 다양한 국적의 도박회사들이 여럿 있다고 한다.

산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폐가들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에서 머물렀다.
폐가도 폐가 나름이라, 어떤 곳은 무척 지저분하고 무서운 분위기이지만,
그 중에서도 나름 깨끗한 곳을 찾을 수도 있다.
처음 지브랄타에 도착해 머물 곳이 없던 차에,
거리에서 드럼 연주를 하며 여행을 하는 불가리아인 친구(이후로 편의상 S)를 우연히 만나,
묵을 곳이 없으면 자기 집으로 오라길래 따라가 보았더니 폐가였다.
집 내부가 대단히 지저분했고, 화장실도,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그런 흉흉한 곳에 혼자 묵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뿐.

S는 생존의 법칙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근처 대형마트에 밤 10시와 11시 사이에 가면,
유통기한이 막 지난 음식들을 대량으로 버리는데,
그 친구는 그때 가서 오렌지며, 바나나, 빵, 요구르트, 피자 따위를 주워와 연명하고 있었다.
또 아침과 샤워는 근처 교회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친구와 그런 생활을 몇일간 했다.
대형마트에서 음식을 버린다는 말은 가끔 들었지만,
여행 중 한 번도 그런 음식을 얻으러 간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꺼림칙했는데, 사실 버리기에는 아까운 여전히 멀쩡한 음식들이 정말 많았다.
가령 바나나가 겉은 조금씩 까매지기 시작해, 판매는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속은 여전히 단단하고 멀쩡하다든지. 부분적으로 상하기는 했으나, 상한 부분만 도려내면 먹을만 하다든지.
그런 걸 어떻게 먹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에 대해서는, 안 그럼 굶을까?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그런 삶을 살 것도 아니고, 그것 역시 하나의 체험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흔히 맥도날드에서 가장 깨끗한 것은 화장실 물이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그러한 맥도날드에서 화장실 물보다도 깨끗하지 못한 햄버거를 돈 주고도 사먹는데,
여전히 멀쩡한 음식들을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S였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불가리아 여행시 나랑 아주 많이 친해진 불가리아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
지브랄타에서 만난 S도 그 친구의 친구였다.
유럽에 아는 친구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한 다리만 걸치면 다 아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몇일간 동고동락했던 S가 밤새도록 음악을 듣고,

자다가도 새벽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밥을 우적우적 소리나게 먹으며,
5분에 한 번씩 빠바방 방귀를 뀌어대며 희열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또 마트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잊지 않기 위함인 것인지,
먹고난 바나나 껍질들을 길 위에 여기 저기 휙휙 던져대고.
시계가 없어서인지 나를 인간시계로 사용하지를 않나.
어쩌다 한두 번 시간을 물어보면 모르겠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물어본다.
게다가 아침에는 알람 맞춰놓고 자기를 깨워줘야 한다고.
나쁜 애는 아니다. 다만 지저분하고, 되게 귀찮은 데다, 같이 있으면 가끔 불편한 친구다.
시각의 차이에 따라 털털하고 재미있는 친구로 볼 수도 있다.
드럼이라는 악기가 다른 악기와 함께라면 모를까,
굉장히 잘 치지 않는 이상은 드럼만으로는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가 쉽지가 않다.
드럼이 S의 꿈인 것 같기는 한데,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잘 치지는 않는다.
한 번은 S가 드럼을 치던 곳 근처의 레스토랑 주인이 나오더니만, S에게 쌍욕을 퍼부어댔다.
드럼 소리가 듣기 싫다고. 드럼 소리가 듣기 싫으면 좋게 얘기하면 될 일이지, 쌍욕은 왜 하는지,
한편으로는 S가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실력은 더 연습해야겠지만,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도서관에서도 유투브 동영상을 열심히 시청하면서 책상을 두들기면서 연습하곤 했다.
물론 도서관에서 조용히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잘못된 행동인 것은 맞으나, 동영상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 집중하는 모습만큼은 높이 사줄만 하다.
나로서 그런 열정을 가져본 적이 언제인가 싶다.

근데 이 친구가 또 욕심은 되게 많아서, 마트에서 음식 얻어올 때도,
하루 안에는 도저히 먹을 수도 없을 양을 가져 온다. 근데 그 음식들이 사실 곧 상할 음식들이기 때문에,
하루 안에 먹지 못하면, 상해서 먹지도 못하고 또 다시 버려야만 한다.

그래도 하루 종일 굶었던 우리로서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저 행복하곤 했다.
하루는 밤새 음악을 듣던 친구에게, 음악을 끄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볼륨을 좀 줄여줄 수 있겠는지 부탁했더니,
음악을 듣고 싶지 않으면, 너가 이 곳을 떠나면 될 일이 아니냐? 여기는 내 집이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무슨 폐가에 니 집 내 집이 어디 있다냐? 너가 먼저 선점한 것은 사실이다만.
암튼 나는 그 친구가 뭐 군대 고참도 아니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라는 말처럼 그 사이 다른 친구를 만나 다른 폐가로 이사를 하게 되기에 이른다.
참고로 불가리아인들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내가 불가리아 친구들이 상당히 많은데, 얘만 그런 거다.


이 친구는 틈만 나면 쓰레기통을 뒤지는데, 고장난 노트북 2개, 역시 고장난 아이폰도 
하나 주워서 고장난 아이폰은 우리 돈으로 8만원 정도에 팔았다.
참고로 내가 아프리카로 가기 전, DSLR을 팔고 작은 카메라로 바꿀까 싶던 차에,

카메라샵에 얼마에 내 카메라를 사 줄 수 있겠는지 물어보니, 10만원 주겠다고.
그 직원은 칼만 안 들었을 뿐, 강도라고나 할까?
암튼 그 친구가 주워서 판 아이폰 가격이랑 내 중고 카메라랑 가격이 거의 비슷하다는 허탈감.

다음 친구는 리투아니아에서 온 친구 M이다.
이전 폐가에 비해, 이 폐가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폐가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좋지는 않으나, 그냥 무허가건물이다.
뭐 그렇다고 무허가건물이 주는 어감도 별로 좋지는 않네? 그냥 빈집.
어찌 되었든 새로 이사한 집은 일단 지저분하지도 않고,
조그만 자물쇠까지 있어 출입할 때 상대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데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화장실이 있다는! 전기와 수도는 이곳에도 없었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 해지면 자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윗층이었다. 윗층에 체코인와 폴란드인 알콜 중독자들이 사는데,
한밤 중에도 맨날 무언가가 와장창 부수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M은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심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대안적인 삶을 살고 싶단다.
지브랄타는 담배가 면세품목이기 때문에, 그 담배를 스페인에 내다 팔면 이익이 남는다.
이 친구는 하루 세 번 국경을 오가며 담배밀수밀매를 해 30유로를 번다. 한 달이면 1000유로이기 때문에 적은 돈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번 돈으로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고 싶단다.
규정상 여러 보루를 사서 국경을 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나,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경찰들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단속을 하는 둥 마는 둥 방관할 뿐이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브랄타 경제라는 것이, 원숭이나 보러오는 관광객, 수많은 도박회사, 담배밀수 정도.
물론 지브랄타는 반도이기 때문에 지중해를 지나는 배에 물과 기름을 채워주는 역할도 한다.
M은 바티칸을 싫어한다. 바티칸이 하는 돈세탁 때문이다.
바티칸을 싫어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다만 내 기준이 엄격한 것일 수는 있으나, 바티칸이 하는 잘못된 행동과,
그 M이 하는 담배밀수밀매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바티칸은 단체이고, M은 개인이라는 것 외에는 나로서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바티칸은 종교단체이고, M은 종교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종교단체만이 선한 행동을 해야 하고, 종교가 없으면 선하지 않고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인가?
M이 담배밀수밀매를 통해 번 돈으로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행동은 M의 선택이고 자유이나,
아프리카 아이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지원받는 돈은 담배밀수밀매를 통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들이 과연 기뻐할 수 있을런지.
선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M의 관점에서 바티칸은 하나의 거대한 악인데, "바티칸이 저지르는 악에 비해,
내가 저지르는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사고방식은 사람들에게 죄를 더욱 부추긴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여 경쟁적으로 죄를 짓다보면 그것이 곧 또 다른 이름의 바티칸이 되는 것이다.
M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바티칸이 되었든, M이든, 나든, 우리에게는 죄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

또 나 역시 M 못지 않게, 뭐 어때? 라는 식으로 죄를 많이 짓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할 때가 많다.
죄 안 짓고 산다는 게 정말 쉽지가 않다. 안 지으려 노력은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고 간 뒤, 우리들의 관계는 다소 서먹해졌다.
그래도 M은 여전히 젠틀한 친구였고. 교회의 무료급식소에서도 의무사항은 아니었으나,
감사한 마음에 누가 시키지는 않았어도 혼자서 묵묵히 청소를 하곤 했다. 물론 담배밀수밀매도 멈추지 않았지만.

무료급식소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역시나 담배밀수밀매를 하는 독일인 청년들. 급식소 아주머니들 앞에서는 싱글거리다가도,
다른 남자들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싹 바뀌어버리며 무료급식소계의 보스를 자처하는
카멜레온 체코인, 혼자서 무슨 의미인지 알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잘 생긴 아저씨, 세상만사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 할아버지(이 할아버지는 한국 소식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는),
존재감이 없는 몇몇들, 앉은 자리에 누군가가 밥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불가리아인 친구 S,
이 모든 이들을 카리스마 하나로 휘어잡는 급식소 할머니...

어쨌거나 우리 모두의 공통점이라면 제도권을 벗어난 아웃사이더라는 것?
독일인 청년들과 친해져, 지브랄타를 떠나기 전 바베큐 굿바이 파티를 열었다.
나 혼자 아웃사이더였더라면 외로웠을 텐데, 똘아이가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란.
무료급식소에 오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개성이 강해, 이야기꺼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는 더럽고 냄새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냥 다 내 친구들일뿐.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국경을 맞대고 한쪽에서는 마약판매가, 다른 한 편에서는 도박과 담배밀수가 성횡한다.
물론 나는 그 어느 것에도 가담하지는 않지만, 참 암울한 에너지로 가득한 곳이다.
S는 드럼을 연주하고 쓰레기통이라도 뒤져 돈을 벌고, M은 담배를 밀수밀매하여 돈을 버는데,
어찌 나만 밥값도 못하고, 선비와 같은 말만 하고 있는지, 한편으로는 스스로도 참 한심했다.
돈과 쾌락만이 추앙받는 도시 지브랄타와 라리냐. 허수아비 경찰들. 무심코 쇼핑 거리를 오가는 관광객들.
그 속에서 사랑을 전하는 무료급식소. 일요일이면 흘러나오는 교회의 찬양 소리.
그러한 것들이 한데 뒤섞여 지브랄타는 오늘도 또 다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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