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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2일 토요일





논쟁할 사람은 논쟁하라 나는 하나님을 놀라워 하리라!


S. 어거스틴






2013년 6월 17일 월요일

세상의 권위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예수를 체험한 사도들



사도행전 5:27 - 5:42


대제사장의 질문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나요?

→ 예수를 죽인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대제사장의 권위로 사도들을 누르고자 하였음.





최근 언제 하나님을 경험했나요?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까요?

→ 19세의 어린 세네갈 친구가 이틀 밤을 집에서 재워주기로 되어 있었다. 사는 동네가 시내 중심에서 상당히 멀었고, 집안 사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부모님과 이야기가 잘 안 되었는지, 이틀 밤을 재워 주기로 했던 처음 약속을 취소하며, 바로 다음 날 나가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해 왔다. 여행 중에는 여러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다른 묵을 곳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5시부터 나를 깨워서는 거의 쫓아내다시피 하던 그 친구. 내가 머무는 하루 동안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그런 행동을 하는 친구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처음부터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친구 대신에 다른 사람을 알아볼 수도 있었던 것인데. 초대해놓고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마침 그 날은 주일이었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한 집사님이 그런 사정을 이해해주시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셨다. 이야기가 잘 되어서, 이달 말까지 있어도 된다고 하셨다. 덕분에 2-3일에 한 번 꼴로 거처를 여기 저기 옮겨다니지 않게 되어 한 시름 덜게 되었다. 그 친구가 쫓아냈을 때는, 기분도 썩 좋지 않았는데, 더 좋은 곳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친구가 쫓아내주지 않았다면, 나는 머물 곳이 있었을 테니, 집사님께서 도와주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문을 닫으실지언정, 동시에 다른 여러 문을 여시는 분이다. 그러한 일들을 살면서 체험해 온 우리는, 당장 눈앞의 작은 고난에 불평하기보다는, 그 분의 은혜를 체험한 증인으로서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증언해야 한다. 





가말리엘의 도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 대제사장의 권세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 역시 한 인간일뿐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천에게만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사두개인 가말리엘은 지혜가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긴 일이 있나요?

→ 수능 전,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철학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철학 공부 아닌 전혀 관심이 없던 일본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철학보다는 상대적으로 실용적인 일본어 공부를 하게 된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살면서 자주 들었다. 적어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사도들은 고난을 기쁘게 견딜 수 있었나요?

→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확신이 있었다.
순간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예수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위해 내가 겪는 고난은 무엇인가요? 그 고난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 세상 사람들, 아이러니하게도 사필귀정을 바라고는 있으나, 정작 바른 말 듣기는 다들 싫어한다.
누가 그런 시시한 것 모르냐는 것이다. 어떻게 모든 것 다 지키고 사느냐고 한다.
바른 말 하는 사람이 환영받기란 쉽지 않고, 오해까지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세상에서 바른 말, 바른 행동해야 한다.
내 힘은 미약해 보일지라도, 나는 선포하고 내 할 일을 다했을 때, 그 다음 더 큰 일은 예수님께서 해 주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처음부터 한정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던,
인정을 받던 못 받던, 예수님을 체험한 나는 묵묵히 나의 할 일을 할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에 비하면, 내가 받은, 그리고 내가 받을 고통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나는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アメリカのコメディアン ジョージ・カーリンが 彼の最愛の妻が亡くなったときに、ボブ・ムーアヘッド牧師の説教を引用し、友人に送ったメールの一部抜粋だそうです。







この時代に生きる 
私たちの矛盾

ビルは空高くなったが 
人の気は短くなり
高速道路は広くなったが 
視野は狭くなり
お金を使ってはいるが 
得る物は少なく
たくさん物を買っているが 
楽しみは少なくなっている

家は大きくなったが 
家庭は小さくなり
より便利になったが 
時間は前よりもない

たくさんの学位を持っても 
センスはなく
知識は増えたが 
決断することは少ない

専門家は大勢いるが 
問題は増えている
薬も増えたが 
健康状態は悪くなっている

飲み過ぎ吸い過ぎ浪費し 
笑うことは少なく
猛スピードで運転し 
すぐ怒り
夜更かしをしすぎて 
起きたときは疲れすぎている

読むことは稀で 
テレビは長く見るが 
祈ることはとても稀である

持ち物は増えているが 
自分の価値は下がっている

喋りすぎるが 
愛することは稀であるどころか憎むことが多すぎる

生計のたてかたは学んだが 
人生を学んではいない
長生きするようになったが 
長らく今を生きていない

月まで行き来できるのに 
近所同士の争いは絶えない

世界は支配したが 
内世界はどうなのか

前より大きい規模のことはなしえたが 
より良いことはなしえていない

空気を浄化し 
魂を汚し
原子核を分裂させられるが 
偏見は取り去ることができない

急ぐことは学んだが 
待つことは覚えず

計画は増えたが 
成し遂げられていない

たくさん書いているが 
学びはせず
情報を手に入れ 
多くのコンピューターを用意しているのに
コミュニケーションはどんどん減っている

ファーストフードで消化は遅く
体は大きいが 
人格は小さく
利益に没頭し 
人間関係は軽薄になっている

世界平和の時代と言われるのに
家族の争いはたえず

レジャーは増えても 
楽しみは少なく
たくさんの食べ物に恵まれても
栄養は少ない

夫婦でかせいでも 
離婚も増え
家は良くなったが 
家庭は壊れている

忘れないでほしい 
愛するものと過ごす時間を
それは永遠には続かないのだ

忘れないでほしい 
すぐそばにいる人を抱きしめることを
あなたが与えることができるこの唯一の宝物には 
1円もかからない

忘れないでほしい
あなたのパートナーや愛する者に
「愛している」と言うことを
心を込めて

あなたの心からのキスと抱擁は
傷をいやしてくれるだろう

忘れないでほしい
もう逢えないかもしれない人の手を握り 
その時間を慈しむことを

愛し 
話し 
あなたの心の中にある
かけがえのない思いを
分かち合おう

人生はどれだけ
呼吸をし続けるかで
決まるのではない

どれだけ
心のふるえる瞬間があるかだ





내 안의 유대 종교 지도자




사도행전 4:1 - 4:1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핍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쉽게 말해 자신들이 잘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예수를 죽여놓고도, 잘못을 전혀 깨닫고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사도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고,
사람들에게의 인기나 평판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그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권위를 더 이상은 누리기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하였다.
엄밀히 말해 사도들이 행한 일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알아야 했음을.
자신들은 사도들처럼 행할 수 없음으로 인해 사도들을 질투하지 않았나 싶다.
허나 그러한 부정적 감정 및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



가둘 수 없는 말씀의 능력, 막아도 퍼져 나가는 복음의 영향력을 언제 어떻게 경험하나요?

→완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의 사리사욕으로 막을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때에 성취될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의 능력, 복음의 영향력은 성취되고 있다.
사도들이 행한 일이었다면, 사도들만 가두어 두어서 해결되었겠지만,
하나님께서 하셨기에, 오천 명에게 복음이 퍼져 나갔다.
악인의 성공이 길어 보일지언정 잠깐일뿐이고, 헛된 성공이다. 모든 것이 사필귀정이 될 것이나,
사필귀정의 기준은 나나 다른 인간이 아닌, 그 분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 분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막아도 퍼져 나가는 복음의 영향력은 당장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결국에는 깨닫게 된다.
끝내 깨닫지 못하는 자들도 있겠으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들에게는 무엇이 귀하고, 귀하지 않은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없다.
모리타니아에서 세네갈로 넘어갈 때 60km 정도 사막에서 물 없이 지나갔다가,
졸도 직전까지 이르러 어느 주유소에서 수도꼭지가 있길래,
극심한 갈증과 허기에 살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미지근하고 맛도 없었지만, 갈증이 해결되어 좀 살만 했다.
그런데 주유소 직원이 비닐 팩에 담긴 차가운 생수를 가져다 주며,
수돗물은 좋지 않으니, 이 물을 마시란다. 마셔보니, 과연 물맛이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통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물은 그냥 차갑기만 했을 뿐,
수돗물인 것은 매한가지란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돗물보다는 낫겠거니 하고 껍질만 다른,
여전히 수돗물을 생수라 착각하며 마시고 있던 것이다. 
비닐 팩에 담긴 물이 수돗물임을 아는 자들은,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마신다. 
근데 그 페트병에 담긴 물은 과연 정말 생수일까?
그 물 또한 수돗물이거나 어쩌면 수돗물보다 못한 물은 아닐까?
비슷한 예로, 원효대사가 여행 중 밤에 무덤가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잠자리 옆 바가지의 물을 마셨다가, 그 물이 밤에는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바가지는 해골이었고, 달콤했던 그 물은 비가 고여 썩어 있던 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분별력 없이 늘 자신만의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버리고 죽이기까지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그 하찮아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귀한 것이었음을.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 하찮은 것 하나 없다. 그 하찮은 것이 바로 나를 구원할 머릿돌이다.



버려진 돌을 보배로, 비참한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이 있는 십자가로 바꾸신 하나님께
내가 드릴 고백은 무엇인가요?

→내 죄가 너무 커, 죽어 마땅함에도 보배로 다시 쓰시려는 하나님의 은혜 갚을 길 없다.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한다. 내 안의 잘못된 것들은 다 죽어야 한다.
쉽지가 않다.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하지만 죽지 않으면, 다시 살 수도 없다.
하찮은 나를 가장 귀하게 바라보시고, 머릿돌로 사용하시려는 주님께 감사하고,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하찮은 존재란 없기에, 
자신들이 보배이고 머릿돌임을 모르고 있는 자들을 사랑으로 섬길 줄 아는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내 안의 유대 종교 지도자의 교만한 마음을 죽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 받는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더 낮춰 주시옵소서.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죽어야 산다 - 김판호 목사(교회성장국장)




죽어야 산다 - 김판호 목사(교회성장국장)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못가에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어느 날 하늘을 날고 있는 새 한 마리에게 “야! 새야, 내 부탁을 좀 들어줄래. 여기 나뭇가지가 있는데, 내가 한쪽 끝을 입으로 물고 네가 다른 쪽 끝을 물고서 날면 내가 더불어 날게 되지 않을까? 내가 하늘을 날 수 있게 도와주겠니?” 라고 부탁했다. 새는 그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드디어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게 되었고, 이 광경을 본 다른 개구리들은 감탄하면서 “야, 그런 기발한 생각을 누가 했니?” 하고 물었다. 입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참다못해 한 마디 했다. “내가!” 바로 그 순간 개구리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내가!”가 오늘날 수많은 갈등의 원인이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바로 ‘나’다. 이 땅에서의 수많은 갈등들의 문제 해결은 자아가 죽을 때 온다. 내 마음의 평안과 기쁨도 자아가 죽으면 찾아온다.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그런데 죽은 우리들은 그렇게 자아가 살아서 활보를 할까? 그것은 죽는 시늉만 했을 뿐 죽지 않고 죽은 척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넘어질 수 있는 육체의 연약성이 있다. 언제나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성이 있는 것이다. 그 연약성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게 잘 속아 넘어간다. 자기는 비교적 좋은 사람, 비교적 착한 사람, 비교적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일을 하고나서도 ‘내가’라는 생각의 기준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내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앞에는 패망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다시 사도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사랑의 일꾼 마더 테레사는 그 위대한 사랑의 일을 한 후에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더 복종하는 다른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면 된다. 내 자아가 죽고 내 안에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할 때 우리의 연약성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설 수 있다. 테레사는 늘 자신을 낮추고 주를 높이는 일생을 보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매 순간 주를 닮고자 하는 나,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스스로 물어보자. 오늘도 나는 죽었는가?


출처 여의도순복음교회 나눔 e-감동 글로 보는 감동(칼럼) 중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합환채를 버려야 한다







창세기 30:14-30:24

레아와 라헬이 둘의 남편 야곱을 놓고 옥신각신한다.

레아는 벌써 아들을 여럿 낳았고,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라헬은 불안하고 마음이 급하다.

그렇다보니 자꾸 딴 곳에 관심을 갖게 된다.

레아의 아들이 어디선가 구해온 합환채.

합환채는 정력제, 말하자면 지금 시대의 비아그라와 같은 것.

자식을 낳지 못한 라헬은,

레아의 아들이 구해온 합환채에 눈독을 들인다.

얼마나 눈독을 들였는지, 남편 야곱도 레아에게 하루 양도해 주겠다고.

기대했던 합환채는 별 효과도 보지 못하고, 이게 웬일인가?

레아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까지 더 낳아버렸다.

레아는 어찌 된 게 그리도 아들딸을 잘 낳는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라헬이 인간적인 마음에 불쌍하기도 하지만,

라헬이 취해야 했던 행동은 합환채가 아니었던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했어야 함에도,

합환채에 눈이 멀어 마땅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라헬.

뒤늦게 깨달은 라헬이 눈물로 기도해 하나님께서 드디어 라헬의 태를 열어 주셨다.

나에게 있어 합환채란 무엇일까?

나를 혹하게 하는 것들.

급한 마음에 합환채 얻으러 다니기 바쁘지는 않은가?

합환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필요하다고 판단하시고,

하나님께 내가 구했을 때 비로소 내게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이리 저리 바삐 움직인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느냐고.

회개가 많이 된다.

내가 헛다리만 짚고 다녔던 것은 아닌지.

하나님.

제게 우선은 합환채를 볼 수 있는 눈과,

합환채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 되게 하여 주소서.







































2013년 3월 18일 월요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 법이 필요치 않은 삶




여행 중에 주일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가고 싶어도 머무는 곳 주위에 교회가 없거나,

있어도 가톨릭 성당이고,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못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 머물고 있는 스페인 알헤시라스에 복음주의 교회가 있다 하여 한 번 찾아가 보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몰몬교 교회도 있는 듯 했지만, 이단은 패스!

스페인어로 예배를 드리며, 헤드폰을 통해 영어 통역을 들을 수 있었다.

찬양하던 자매의 목소리에 복음을 선포하는 강한 힘이 느껴져, 대단히 좋았다.

말씀은 스페인어가 유창하신 미국인 선교사님이 해 주셨다. 통역은 사모님이.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이 만나는 유명한 장면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 팔레스타인을 여행할 시절 야곱의 우물가를 실제로 찾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안타깝게도 야곱의 우물 기념교회 밖 도로옆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랍어 낙서들로 가득했지만.

또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교회 관리인처럼 보이는 아랍인이 교회 지하 우물터를 볼 수 있는 시간을

몇 초밖에 허락해 주지 않았고, 무슨 기념품 가게 마냥 판매하는 건 어찌 또 그리 많던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요셉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도, 아랍의 아이들은 여전히 내게 돌을 던져대고,

그 터만 콘크리트로 대충 복원해 놓고 정작 안에는 텅비어 아무 것도 없었는데,

경찰 2명은 절대 사진은 찍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경고를 !

역시 시간은 몇 초밖에 주지 않고, 그대로 내쫓아버리더라는.

조금 더 보려면 그 손에 돈이라도 쥐어 주었어야 했나? 라는 의심도 갔지만.

그리고 사진 찍고 싶어도 찍을 것도 없더만? 도대체 뭘 찍지 말라는 것인지?

유명한 성지마다 무슨 장사꾼들이 그리도 많은지, 정말 매번 불쾌하고,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셨다면, 아마도 다 뒤집어엎어 버리시고,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호통을 치셨을 것만 같다.

아무튼 설교 이야기로 돌아가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천시하던 사회 분위기상,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남성이었던 예수님이, 홀로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건다는 것 역시 비상식적이고 파격적인 일이었다.

수가성 여인에게 우물 물을 마시면 다시 목이 마를 것이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이 말하기 전에, 수가성 여인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3대 욕구라 하는 식욕, 수면욕, 성욕.

언뜻 이 세 가지만 잘 충족되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욕구라는 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필요조건일뿐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쉽게 말해 사람은 먹고만 사는 존재가 아니고,

일단 욕구가 충족되면, 더 큰 욕구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욕구 그 이상의 것을 주시겠다고.

영원히 깨이지 않는 기쁨을 주시겠다고.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겠다고.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인가?

가령 새 가방을 하나 사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시간이 지나 가방이 낡으면, 나는 또 다른 새 가방을 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처음 가방을 사서 날아갈 듯한 기분을

영원히 지속시켜 주시겠다는 거다.

어떠한 물건을 사서 얻는, 맛있는 것을 먹어서 얻는 그 정도 차원의 욕구충족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웬만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세상의 그 비싸고 화려해 보이는 것들.

그 때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부질없고 언젠가는 다 사라져버릴 것들이다.

죽을 때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5분 후에 죽을지, 50년 후에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죽을 때 가진 것 다 싸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니까.

죽을 고비를 넘겨본 사람들은 더 잘 알 수 있겠지.

또 사는 동안에도 가진 게 많아서는 불안하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계속 자랑질해야 되니까.

또 수가성 여인을 만나셨을 때 모든 율법을 깨어 버리신 예수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등)

요새 들어 여러 관공서를 통해 서류들을 준비하면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룰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규정상 안 된다.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다.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도대체 룰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예수님처럼 룰보다 마음이 먼저인 것을.

룰이라는 것 지켜 마땅하다. 다만 내가 요새 만나는 사람들은 그 룰이라는 것 뒤에

숨어서 앵무새처럼 룰 이야기만 반복해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한다.

그 분을 안다는 것이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는 길이기에.

예수님처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힘이 들고 좁은 길이겠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야곱의 우물터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셨을 것으로 추청되는 곳




교회 옆 벽 낙서들

팔레스타인 해방에 관한 내용인 듯 한데 

장소를 가려서 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야곱의 우물 기념교회









교회 앞 화려한 모자이크




교회 내부




천정의 예수님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각을 뜨는 것인지?




요한




수가성 여인을 만나신 예수님







성경시대에는 세겜이라 불리었고,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





경찰이 사진을 찍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요셉의 무덤





나무들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에발산으로 짐작




수북히 쌓인 쌀밥과 참치 한 캔의 소박한 점심

음식을 주신 주님께 감사!





궂었던 날씨 속의 무지개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사명을 다 한 아브라함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삭, 이스마엘 그리고 그들의 후손에게 남겨진 과제





창세기 25:1-25:18

아브라함이 할 일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어졌다.

사라, 하갈, 그두라를 통해.

아브라함은 장자권 이양과 재산분배도 하였다.

이삭과 이스마엘도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배다른 형제라 서로를 싫어했을까? 서로가 자신이 진정한 장자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실제로는 서로를 이해했을 지도.

설령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최소한 아버지의 장례식은 함께 치렀다.

아브라함은 또 어떠했을까? 이스마엘을 차별했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아랍의 조상인 이스마엘을 이삭보다 먼저 낳아 버린 것은,

인간적인 마음으로 볼 때, 안타깝기 그지 없다. 조금만 더 기다릴 것이지.

하지만 어쩌겠나.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아무리 인내심 많은 아브라함도 도저히 아기를 낳을 수 없을 것 같은 노령의 나이 앞에

불안하고 초조했고 더는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마엘을 허락하셨는지.

또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시고, 자손을 번성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이스마엘을 사랑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허락하신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의 후손이 서로 싸우기를 바라셨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인간적 실수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믿음 좋은 아브라함이라 할 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것이라는 것, 잘 알고 계신다.

그것은 아담도, 하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실수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실수를 통해 내가 깨닫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고 받고 싸우라고 이스마엘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백보 양보하여 코란에서 말하듯 이스마엘이 장자라고 가정하고,

겉으로나마 평화를 표방하는 이슬람이,

서자 이삭의 후손과 싸우고 그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용납할 수 없다.

이삭과 이스마엘, 인간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면 서로 남남이다.

연락 끊고 안 보고 살면 그만이다.

근데 그게 안 된다. 싫어도 어떻게든 얽히게 되어 있다.

이슬람, 유대교, 크리스천이 너는 너, 나는 나가 안 되듯.


누가 장자인가의 문제,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마엘이나 이삭을 허락하셨던 것은,

언제까지나 싸우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남보다도 못한 너의 그 배 다른 형제에 대해 곰곰히 잘 생각해 보라고,

미워 죽겠는 그 놈이 바로 너의 형제라고.

더 이상 미워하지 말라고. 그 마음  버리라고.

사랑하라고.

더 나아가서는 육체적 형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이 사실 모두 너의 형제라고.

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허락하셨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실수였을지언정

역설적이게도 필연적으로 태어나야만 했다.

이삭을 가르치기 위해, 온 인류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들의 아픔을 품고 받아주어야 한다.





















2013년 2월 15일 금요일

쇠뿔도 단김에 빼라




창세기 24:54~60

나에게는 여러 문제가 있다.

좋게 말해 신중, 나쁘게 말해 우물쭈물.

우물쭈물. 이거 좋지 않다.

아브라함의 종과 리브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공통된 확신이 있었기에,

지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 생각되는 것,

옳다고 생각되는 것 미룰 이유가 없다.

가령 나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시계가 2시 45분이면 3시부터 해야지!

정작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고, 3시 5분을 가리킨다.

미루고 싶은 귀차니즘이 또 다시 스물스물 기어올라온다.

그럼 또 나는 안 되겠다! 3시 10분부터 해야겠다. 하는 것이다.

2시 45분에 즉시 해야 한다 즉시.

우물쭈물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없다.

아무 것도.

가령 쉼에 있어서도,

쉬어야 되는데...라고 생각하거나 중얼거릴 것 없다.

쉬어야 하면, 그냥 즉시 가서 쉬면 그만이다.




리브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가족들에 대한 미련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가다니,

내가 가족의 입장이었다면 다소 서운했을 것 같기도.

그것과는 별개로,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리브가와 같은 마음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따지는 게 많다.

그러다 보니 결혼시기도 놓치는 것 아닐까?

뭘 그렇게들 많이 따져야 하는 것인지.

결혼 안 해 본 내 입장에서 할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철 없을 때 결혼한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리브가와 이삭이 하나님께서 맺어주셨다 해도,

때로는 의견이 충돌할 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냥 그러면서 사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게도 난 물질적 부자가 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돈 쫓아다닌다고 해서 부자가 될 것 같지도 않다.

마음이 부자라면 또 모를까.

태평한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물질적 부자가 되는 것이 나의 길이라면,

하나님이 준비해주시고 채워주시리라 믿고, 안 채워주셔도 안 채워주시는 것이 내게는 더

베스트이기에 안 채워주실 거라 생각한다.

여행을 하며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것도 좋지만,

가정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내게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다면, 이렇게 세계일주 하기는 쉽지는 않겠지만.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얘기도 많이 들려주고 싶고.

함께 여행도 다니고 싶다.

사진도 많이 찍어 주고 싶고.

아내랑 자식이랑 자전거 여행 다니면서 캠핑하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씩 상상을 해본다.

정작 가족들은 캠핑을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텐트 속에서 아들과 함께 꼭 붙어서 자도 좋을 것 같고.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도 같이 만들어 먹고.

물질적 부자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리브가는 어디 있고,

리브가를 만났을 때,

나는 지체 없이 움켜쥔 것들을 버릴 수 있을까? 언제가 그 타이밍인가?

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과연 나는 리브가와 같은 믿음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2013년 2월 14일 목요일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오늘의 말씀에서는 창세기 24:32-33에 주목하고 싶다.

32 그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낙타의 짐을 부리고 짚과 사료를 낙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의 동행자들의 발 씻을 물을 주고

33 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 그 사람이 이르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이르되 말하소서


아브라함의 종과 동행자들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다.

여행으로 인해 피곤하기도 할 것이고, 시장하기도 할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종은 자신이 왜 그곳까지 왔는지 잊지 않고 있다가,

자신이 그곳에 온 이유를 밝히기 전에는 바로 눈앞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금강산 보러 왔으니, 금강산부터 보겠다는 것이다. 먹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이 전부가 아니고,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친절에는 크게 두 가지 친절이 있다고 본다.

리브가와 같이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친절.

라반과 같이 상대방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려는 친절.

종은 라반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나 또한 늘 말씀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문제(배가 고픔, 피곤)보다 근본적인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고 행하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이곳 스페인 그라나다까지 보내셨을까?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고 배우게 해주시고 싶으셨던 걸까?

그렇게 훈련시켜서 어디에 쓰시려고 하신 걸까?

곰곰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대가를 치루어야 비로소 당당해질 수 있고 약속도 이루어진다




너무나 오랜만에 쓰는 블로그

그래도 말씀 묵상으로 재시작 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장기간 여행하는 것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끼니와 잘 곳, 빨래로 시작해, 자금관리, 시간관리, 인간관계, 관광 등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피로도 쉽게 누적되고, 장기간 여행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되돌아보면 막상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하루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곤 한다. 늦은 감이 없지 않아 많지만, 이제부터라도 블로그를 써 보고자 한다.

일이 더 늘어버린 셈이다. 조금 더 부지런해지는 수 외에는 방법이 없다.

네이버 블로그를 쓸까 하다가, 외국인 친구들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구글 블로그를 사용하기로 했다.

초등학교 이후로 컴퓨터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로서는 네이버나 다음처럼 그냥 던져주는

대로 사용하면 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구글 블로그는 html이나 자바스크립트를

조금 알아야 되나 보다. 어제는 고작 블로그 우측에 있는 카테고리 만드는데 하루를 꼬박

다 탕진하고 말았다. 덕분에 지금은 스페인 코르도바에 와 있는데,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보지도 못하고 말았지만, 누구나 똑같은 블로그가 아니라,

공부한 만큼 꾸며가다보면 나만의 블로그가 완성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다.

둔해져 버린 내 두뇌가 문제이지만.

html이라는 것을 처음 다루면서, 초등학교 때 달러, 별과 같은 것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내는 베이직 생각도 났다.

암튼 바쁜 일상에 쫓긴 나머지, 가장 중요한 말씀 묵상하는 시간에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었다. 오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죽은 아내 사라의 장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헤브론은 내가 팔레스타인에 있을 때 실제로 들렀던 곳이라 말씀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왔다.

헷족속은 아브라함에게 무료로 매장지를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그 대가를 분명히 치루었다.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지 않았다면 후에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값을 치룰 능력이 되는데, 치루지 않으면 아무리 공짜로 얻은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다.

코르도바에 오기 전 세비야에 있을 때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굵직한 여러 굴뚝들이 있는 것과 세라믹이라는 글씨를 통해 미루어 볼 때,

그 옛날 도자기를 굽던 곳이 아닐까 짐작했다. 꽤 규모가 큰 건물이었고 아주 한적했다.

한 건물 중 무슨 거적때기 비슷한 것으로 대충 가려놓은 곳이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있는 걸까 궁금했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들어가길래 궁금하던 차에 나도 뒤따라 들어가

보았더니 미술관이었다. 규모가 상당했다. Ai Weiwei를 비롯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거적때기가 있던 곳은 도저히 미술관 입구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키고 서 있는 사람도 없었고. 안타깝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곳이 아니면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지 않는다. 첫째, 이 세상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너무 많고, 난 그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 갈 충분한 돈이 없다. 둘째, 내가 여행하며 보는 모든 곳이 미술관이고

박물관인데, 굳이 그 안에 들어가서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나 레이나 소피아와 같이 상시 무료관람이 가능하거나,

미술관에 따라서 특정요일에는 무료로 개방한다던지 하는 경우에는 때를 맞춰서

들어가는 경우는 있다.

그 거적때기가 있던 곳은 실제 입구가 아니라, 관계자만 드나 드는

비밀통로 같은 것이었던 것인지 잘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표를 사지 않고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관람하는 내내 마음이 찝찝했다. 표를 사야 하는 줄 알았다면 애당초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주머니에 가진 돈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까지 가서 돈을 가져와 지불하고자 할 마음도 없었다.

귀찮았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나와는 달랐다. 찝찝한 마음을 남기지 않았고, 대가를 지불해 당당했다.

그로 인해 그 땅은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되는 약속성취의

표상이 되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덥썩 문다는 것, 아주 쉬운 일이다.

단순히 미술관 티켓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일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고,

그 유혹이 클수록 뿌리치기 힘들고, 오히려 정당화하기 바쁘다.

다들 그렇게 한다고.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고.

나는 더 큰 축복, 약속을 기대해야 겠다.

눈 앞에 공짜 관람. 별로 기쁘지 않다.

대가를 치루는 삶, 나의 십자가를 지는 삶,

그 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다.






















헤브론에서 찍은 사진들을 몇 장 함께 올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긴장이 팽팽한 곳이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한 사람씩

회전문을 통해 검문을 받으며 통과해야 한다. 내가 방문한 때는 이스라엘의 축제기간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며 일부 어른들도 옷을 재미있게 차려입고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한편 아랍의 일부 아이들은 외국인에게 돌을 던지며 장난을 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인티파타와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 돌이 때로는 크기가 꽤 크고, 강하게 던지기 때문에, 위력이 상당하고 때로는 위협적이다.

아이들은 돌을 던지면서도 웃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저 장난일 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도 아닌 나에게조차 언제 어디서 갑자기 돌이 날아올지 몰라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사리분별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섣불리 아이들을 겁주려 했다가, 아이들을 흥분케 해서는,

되려 떼로 몰려와 돌팔매질을 당할 수도 있다.

프랑스인 친구와 요르단에 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다행히 그 친구가 아랍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 타일렀더니, 아이들이 갑자기 천사처럼 변해,

나중에는 들판에서 함께 어깨 동무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지낸 기억이 있다.

돌을 던진 아이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모를 뿐이다. 돌을 던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그것은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를 죽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몰랐다. 우리에게 예수를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었음을.

또 그 죽음이 우리를 용서하게 되는 사건이었음을.

그 아이들을 통해 미루어볼 때, 사람은 상황과 경우에 따라 악마가 될 수도, 천사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